문종 . 측우기를 만들다(2)
문종은 조선 개국 이래 첫 번째 장남이자 계승한 정통성 있는 왕이었습니다아버지의 성품을 그대로 이어받아 신중하고 끈질긴 왕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종에 대해서는 알지만 문종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문종을 아는 사람들도 '일찍 죽은 왕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이는 문종이 세자로 지낸 기간이 너무 길어서 생긴 오해입니다. 30년 가까이 세자로 지냈기 때문입니다.
1429년(세종 11년) 가례를 올리는데, 휘빈 김씨는 세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주술을 쓰다 발각되어 폐위되고, 순빈 봉씨는 폭력적인 성격에 내인 소쌍과 함께 자려는 동성애적 기질을 보여 폐위되었습니다.이후 후궁이었던 승휘권씨를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권씨도 1441년 단종을 낳은 다음날 산후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성실한 태자 수업을 받은 문종은 준비된 왕이었습니다.
문종은 세자 때 세자사 하연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닦았는데 어려서부터 성품이 너그럽고 두터워 누구에게나 좋다고 했습니다.
1421년부터 1450년까지 29년간 세자로 지내는 동안 아버지 세종의 정치를 보좌했습니다. 문관과 무관을 두루 등용하고 언관언론에 대해 관대한 정치를 함으로써 언론을 활성화하고 민심을 파악하는 데 힘써왔다고 전해집니다.1442년(세종 24) 세종이 병석에 누워 국정을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세종 대신 8년의 대리청정기간 동안 국사를 지냈습니다.
이때 세종은 세자가 임금처럼 남쪽을 보고 앉아 조회를 받고, 모든 관원은 뜰 아래서 신하로 부르도록 했습니다. 또한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서무는 모두 세자의 결재를 받도록 하였다고 합니다.그리고 마침내 수조당을 건립하여 세자가 섭정하는데 필요한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결국 1445년부터 세자의 섭정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섭정은 세종이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고 문종은 즉위하기 전부터 실제적인 정치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종 때의 정치 방식이나 분위기는 세종 후반기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세종대에 비해 약간 위축됩니다.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종친세력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도 이미 이때부터 포착됐고, 이를 견제하는 언관(언관 종친 탄핵 보도)이 탄핵 보도를 하면서 긴장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한다.
이 시대의 언관 언론은 정치 전반에 걸쳐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특히 척불언론이 두드러졌습니다. 그것은 세종 말기 왕의 호불경향에 대한 유신들의 반발로 해석됩니다.
즉, 세종 말기 세종과 왕실의 각종 불교행사와 내불당 건립 등 불교적 경향을 막는 데 실패한 유학자적 언관들은 문종이 즉위하자 왕실에서의 불교적 경향을 불식하고 유교적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당시 언론은 왕권이나 기타 세력에 관계없이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자주 구언하였고, 언로가 넓지 않다고 생각하여 조신 6품 이상의 윤대를 허락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450년 음력 2월 세종이 승하하면 왕으로 즉위하지만 이미 대리정치를 했기 때문에 공백기간 동안 정사 처리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세종은 생전에 문종을 보살펴 병상에서도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었고 당시 세자였던 문종도 병약하여 오래 살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여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세손의 앞날을 당부하였다고 합니다.
문종 재위 시기에 『동국병감』이 출판되었고, 1451년(문종 1) 『고려사』(139권), 1452년 『고려 사절요』 등이 편찬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병제를 정비하여 3군 12사를 5사로 줄인 반면, 병력을 증대시켜 각 병종을 5사로 배분하기도 하였습니다.
유학이나 천문, 역법, 산술 등에도 조예가 깊어졌다고 합니다.
학문을 매우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정량적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를 발명했을 정도로 천문학과 산술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세종실록 세종 23년(1441년) 4월 을미(태양력 5월 19일) 근래 세자는 가뭄을 염려해 비가 올 때마다 젖어 갔던 분수를 땅에 파보았다. 그러나 정확히 비가 내리는 것을 몰랐기에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든 뒤 궁중에 두고 빗물이 그릇에 고인 분수를 실험했습니다"라는 측우기에 관한 첫 기술이 있다고 합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1957년 2월 8일 정부가 1957년 2월 제19차 국무회의에서 5월 19일을 발명의 날로 정하려 한 것은 문종이 측우기를 발명했다는 기술이 음력 4월 29일(양력 5월 19일)에 처음 등장했다는 기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문종은 재위 기간 중 언론 활성화, 역사서 편찬, 병법 정비 등의 업적을 남기며 유연성과 강인한 정치를 펼치려 했습니다.
문종은 황태자 때 진법을 편찬할 정도로 국방에도 관심이 많았고, 병력을 증대시켜 병법의 정비와 국방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습니다.
태종 때의 화차도 새롭게 개발해서 만일의 전쟁과 국방에 대비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세종과 어머니의 3년 장례가 잇따르면서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세종의 명을 대신했던 김종서가 한때 섭정을 해야 했던 때도 있습니다.
결국 즉위한 지 2년 3개월만인 1452년 음력 5월 37세의 나이로 경복궁 천추전에서 승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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